성폭행 피해 고소했더니 정신병자로 몰려

  • 매체 미디어다음
  • 등록일 2006.05.06
  • 조회수 4,009
지난 1일 성폭력 피해를 당한 아이들의 어머니 10 여명이 서울 마포구 홍대 앞 카페에 모였다. 이들이 경찰 수사 과정에서 받은 인권 침해와 사회로부터 받은 따가운 눈총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잡히지 않는 범인은 이제 그만 용서하고 아이와 함께 편안해지라고. 아동성폭행과 싸워온 이들의 사연을 들여다보면 왜 그런 말이 나오는지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다.

어머니들은 “너무 힘들지만 아동성폭행범이 합당한 처벌을 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움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어머니들은 “자신의 사건이 끝났다고 나 몰라라 하지 말고 아동성폭력 피해 근절을 위한 정부의 의지와 정책을 이끌어내기 위해 지속적으로 힘을 모으자”고 약속했다.

진단서 한 장 받는데 35시간 헤매
병원들 “성폭행으로 인한 외상 진단서 끊어줄 수 없다”


성폭력 피해 아동의 어머니들은 성폭행 피해에 대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했을 때 의사나 경찰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2003년 4월 30일 일산에 사는 김수령(가명)씨는 성추행으로 인한 아이의 외상을 입증할 진단서를 받기 위해 무려 35시간을 헤매야만 했다. 김씨는 성폭력 상담소에서 소개한 산부인과와 정신과를 찾았다. 그러나 산부인과에서는 경찰병원에 가라며 모녀를 돌려보냈다. 정신과 의사는 “법적 대응을 할 것이냐”고 묻더니 “뚜렷한 증거도 없는데 아이 말을 믿을 수 있느냐”며 진료를 거부했다. 김씨는 곧장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경찰병원으로 향했지만 이번에는 경찰이 동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당했다.

다음 날에도 김씨의 ‘수난’은 계속됐다. 인근 경찰서를 찾은 김씨는 “현재 경찰 인력이 없으니 일반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으라”는 말을 들었다. 김씨는 인근 I 병원에서 2시간을 기다린 끝에 진료를 받았지만 의사는 진단서도 끊어주지 않고 경찰병원에 가라고 다시 떠밀었다. 근처 파출소도 자신의 관할이 아니라며 미루는 바람에 결국 김씨가 관할 파출소 경찰과 동행해 경찰 병원에서 ‘대음순 주변 발적 좌상’이라는 진단을 받고 난 시간은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김씨는 “찾아가는 병원마다 아이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니 경찰 조사에 불려 다닐 것이 귀찮아 진료를 거부했다”며 분개했다.

성폭행 피해 입증하려면 수사관으로 변신하라?

성폭력피해를 당한 부모들이 법에 피해를 호소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직접 수사관으로 ‘변신’해야 한다. 직장 생활 등 일상 생활은 모조리 포기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수민(7)이는 경찰 조사에서 “가해자인 보모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남자와 성 관계를 가졌다”고 말했다. 수민이의 주장이 확실한지 수사를 진행해야 할 수사관은 어머니 지씨에게 “수민이가 보았다는 그 남자의 연락처와 신원을 알아오라”고 주문했다. 지씨는 “용의자를 수사해서 공범인 남자를 붙잡아야 할 경찰이 오히려 피해자인 나에게 증거를 찾아 오라고 요구했다”며 “이게 말이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동 성폭행 혐의로 신부를 고소한 전미희(가명)씨가 경찰에게 들은 말도 “증거를 가져오라”였다. 피해를 입증할 진단서를 받고 아이를 치료하는데 들어간 비용도 수 백만원이 넘었다. 부산에서 전문 치료 기관이 있는 서울까지 왕복하는 데 20~30만원의 비용이 들어가 전씨는 아예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에 정착했다. 사업하는 남편은 부산에 남았다. 아이가 서울에서 입원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수사를 해야 한다는 검사의 통보가 떨어지면 아픈 아이를 달래 부산으로 향해야만 했다.

”위자료 타려고 별 짓 한다”
피해 사실 고발했다는 이유로 공동체에서 매장당하기도



[사진=연합뉴스] 성폭력 전담부서와 진술녹화실은 마련됐지만 문제는 수사 인력의 전문성과 책임감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사회적인 지위나 명성을 가진 상대일 경우 법적 싸움은 더욱 어려워진다. 개인이 아니라 학원이나 학교, 종교단체 등 집단이나 기관을 상대로 하는 싸움으로 변질되고 피해자는 집단으로부터 ‘왕따’와 멸시를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담임 교사를 고발한 고형민씨(가명)와 아들 성준이는 학교로부터 ‘문제를 키우지 말고 조용히 전학가라’는 종용을 받았다. 성준이는 친구들로부터 “너희 엄마가 위자료 타려고 난리 친다”는 아이들의 조롱을 견뎌야 했다. 뿐만 아니라 검사는 수사는 뒷전인 채 “가해자가 자살할 까봐 걱정이다, 경제도 안 좋은데 가해자가 실직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피해자와의 합의를 유도했다.

신부를 고소한 전미희씨도 고통을 호소했다. 신부와의 싸움은 개인 간의 싸움으로 머물지 않고 종교단체와의 싸움으로 변질됐다. 심지어는 변호사조차 구할 수 없었다. 문제의 신부가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단체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단체의 변호사들까지도 사건 수임을 꺼렸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하루 아침에 전씨와 가족들은 ‘패륜 가족’으로 몰렸다. 일부 신도들은 “아이의 진술을 조작한 전씨는 정신병자다. 성추행범은 소영이의 아빠나 오빠일 것이다”고 손가락질 했다. 전씨는 “이 싸움으로 우리 가족은 심한 상처를 입고 가정이 파괴되다시피 했다“며 “어느 누가 위자료를 노리고 이런 고통을 감내하며 싸우겠느냐, 지금까지 당한 고통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싸움을 포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동성폭력 범죄, 증거 잘 남지 않아 수사에 어려움

법률전문가들은 아동성폭행은 사건의 특성상 용의자의 자백이 없으면 범인을 잡기 힘들다고 말한다. 때문에 어머니들은 “용의자가 기소돼 재판이라도 한 번 해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입을 모은다. 법적 싸움이 힘들고 아이의 상처가 커질 것을 우려한 어머니들은 고소를 포기하거나 남들의 이목이 두려워 오히려 피해 사실을 숨기는 경우도 있다. 해바라기 아동센터에 성폭력 피해를 호소한 143명 가운데 52명(36.4%)은 ‘고소를 하지 않겠다’고, 34명(23.7%)은 ‘고소를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해바라기 아동센터의 법률자문을 맡고 있는 조인섭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아동성폭력에 대한 판례가 아직 많지 않고 외국처럼 재판 과정에서 대질심문을 통해 죄를 가릴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아동 성폭력 피해를 법적으로 해결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고 말했다. 조 변호사는 또 “성폭력 수사의 특성상 정액이나 머리카락 등 DNA 검사로 범인을 밝히는데 아동의 경우 물리적으로 성기를 삽입하는 강간이 어려워 추행하는 경우가 많아 증거가 잘 남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또 진술 녹화 과정에서 아이들이 성폭력에 대한 스트레스로 상황을 왜곡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수사에 어려움이 따른다고 지적했다.

성폭력 전담 부서 경찰관 ”편하려고 여성청소년계 왔더니…”
아동성폭력 전담 업무 책임감과 전문성 갖춰야...



신부를 고소한 전씨가 경찰을 찾았을 때 들은 말은 “교통계에서 고생을 해서 좀 편안히 있어볼까 하고 여성청소년계로 왔는데 왜 이렇게 귀찮은 사건이 터졌지”라는 푸념이었다. 성폭행 사건을 전담 부서인 여성청소년계 업무를 소속 경찰관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아동 성폭력 전문가들은 아동 성폭행 사건 전담 부서가 생겨났지만 정작 전문성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한국 성폭력 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 수사 인력의 양성”이라고 강조했다. 이 소장은 “아직도 아동 성폭력 사건을 담당하는 수사관들의 태도가 남성 중심적이고 성인들을 수사하는 방식에 머물러 있다”며 “전담 부서인 여성청소년계의 경우 인사 이동이 1, 2년 마다 이뤄지기 때문에 책임감과 전문성을 갖춘 인력을 키워낼 수 있는 구조가 되지 못 한다”고 지적했다. 10년, 20년 경력의 베테랑 수사관의 지휘 아래 아동 성폭력 수사가 진행되는 외국의 사례와 대비된다는 것.

아동 성폭행에 대한 경찰의 전문성 확보에 대해 경찰청 여성계의 한 관계자는 “어느 조직이나 더 좋은 대우, 좋은 보직을 맡기 위한 경쟁이 있지 않느냐”며 “조직원들이 여성청소년계 업무를 선호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담부서의 인력을 무조건 현재대로 유지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과거에는 수사 업무와 관리 업무가 분리되지 않아 수사 인력을 양성하는데 어려운 면이 없지 않았지만 이제는 수사 업무와 관리 부서의 업무를 분리해 수사관은 계속 수사만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동성폭행 당했을 경우… ”흥분하지 말고 냉철하게 대처하세요”

아동성폭력 피해자 지원 단체의 관계자들은 아동성폭력 사건은 보호자의 냉철한 대처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관련 법규나 수사 과정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피해아동의 부모들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수사관을 대하면서 나타나는 부작용도 적지 않다는 것.

해바라기 아동센터 최경숙 소장은 “경찰들이 아동성폭력 사건에 대한 노하우가 부족한 점도 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피해 아동 어머니들의 편만 들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의 아이가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에 흥분한 일부 어머니들의 경우 아이들을 다그치거나 진술을 종용해서 아이에게 또 다른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는 것. 최 소장은 “아이가 피해를 당했을 경우 힘들겠지만 냉정을 유지해 관련 단체의 지원을 받고 아이가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 최대한 객관적이고 일관성 있는 진술을 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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